목 격 자
1) 루치아 (Lucia de Jesus )
성모님 발현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이다.
예수의 루치아 수녀는 1907년 5월 22일 파티마 본당 관할 지역의 마을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파티마 교구 본당에서 3월 30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안토니오 산토스와 마리아 로사이다. 일곱 형제 중 막내인 루치아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루치아의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많은 문제와 곤란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 모두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길렀다. 가정의 여건으로 루치아는 목동으로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루치아는 성모님의 발현 기간 동안 특별한 몫을 해야 했는데,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오직 그녀와 이야기하셨으며 그녀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그것은 미래에 드러날 것이었다. 발현 후 그 진실과 성모님의 원의를 따라 루치아는 학교에 다녔다. 14세 되던 해 1921년 6월 17일 루치아는 성 도로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루치아는 덕성과 종교적 기품을 교육받았다. 그녀는 선생님이 보여준 모범과 그들에 대한 자신의 감사로 스페인 투이에 위치한 도로시 수녀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수도복과 고통의 마리아 루치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28년 10월 3일, 루치아는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하였고 1934년 10월 3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1948년 3월 25일, 루치아 수녀는 코임브라에 있는 성녀 데레사의 가르멜 수녀회로 들어가서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의 루치아 수녀로 수도명을 받고 1959년 5월 3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루치아 수녀는 자신의 기억을 『파티마, 루치아의 회고』로 남겼다. 이 회고록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또한 그녀는 『파티마 메시지의 요청』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루치아 수녀는 2005년 2월 13일, 향년 97세로 코임브라의 가르멜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수천 명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2006년 2월 19일 루치아의 유해는 코바다 다 이리아에 있는 파티마 묵주기도의 모후 대성전 히야친타의 묘지 옆으로 모셔졌다.
2. 프란치스코 마르토(Francisco Marto)
프란치스코 마르토는 1908년 7월 11일 파티마 본당 소속인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났다. 9일 뒤 7월 20일 그는 파티마 본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와 히야친타의 아버지 마뉴엘 페드로 마르토(1873-1957)는 매우 진지하고 경건하였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올림피아(1870-1956)는 단순하고 독실한 여인으로 루치아의 아버지의 동생이다. 얼굴이 동그스럼한 소년인 프란치스코는 밝은 눈빛과 균형잡힌 체격으로 외모가 아주 수려하였다. 그는 생애에서 단 한번 병으로 고통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동네의 비슷한 아이들과 같이 그는 단순히 긴 바지와 짧은 외투를 입었었다. 머리에는 그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꼬깔 모자를 썼다. 그의 성격적 기질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온순하고 아주 겸손하며 인내심이 있었고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평온하고 균형이 잡혔으며 수다와 소란스러움, 흥분하여 동요되는 것을 천성적으로 싫어하였다. 그는 과묵하고 마음이 열려있었으며 즐거움을 아는 산골 소년이었다. 그의 영혼은 깊이 묵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수다를 떨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듣고 생각하는 데에 마음을 더 기울였고 활동하기보다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었다. 아주 섬세하고 관상적인 그는 자신의 모든 기도와 희생을 “많은 죄 때문에 슬퍼하시는 우리 주님을 위로하기 위해” 바쳤다. 루치아는 그녀의 어린 사촌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특성과 선행 실천은 별도로 하더라도 프란치스코는 모든 면에서 히야친타의 형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히야친타와 달리 그는 변덕스럽지도 않고 명랑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는 천성적으로 조용하고 온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919년 4월 4일 자신의 부모의 집에서 거룩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시신은 본당 소속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1952년 3월 13일 대성전의 동쪽 편으로 이장하였다.
3. 히야친타 마르토(Jacinta Marto)
프란치스코의 동생 히야친타 마르토는 1910년 3월 11일 파티마 본당 소속 작은 마을 알주스트렐에서 태어났다. 파티마 성당에서 3월 19일에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대모와 같은 히야친타로 이름을 받았다.
이 어린 목동에 대하여 그의 사촌 언니 루치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히야친타는 나이와는 달리 어떻게 하면 성덕으로 나아가며, 하느님과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께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권고한 기도와 희생의 정신을 히야친타가 얼마나 잘 이해하였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나는 히야친타의 성덕을 높이 평가한다. 그녀는 성모님으로부터 넘치는 은총을 받았으며, 하느님과 덕행에 대해 아주 훌륭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히야친타는 길고 고통스런 병고 끝에 1920년 2월 20일 리스본의 에스떼파니아 병원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동안 히야친타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죄인들의 회개와 세상의 평화, 그리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을 위해 봉헌하였다. 1935년 9월 12일, 히야친타의 몸은 전혀 부패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다. 유해는 오우렘에 있는 교회묘지에서 파티마의 묘지 그녀의 오빠 프란치스코의 옆으로 장중하게 이장되었다. 1951년 5월 1일, 히야친타의 유해는 다시 발현기념성당의 유해 봉안소에 안치되었다.